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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창세기 11:1-9)

my gospel 2024. 3. 11. 19:17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창세기 11:1-9)


<46>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창세기 11:1-9 (1-4절을 중심으로)


한근호 목사


들어가는 말


 창세기 9-10장에서는 노아 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을 통해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노아 대홍수 이후 인류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바벨탑 건축사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1장 / 개역개정)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가운데 말

1. 시날 땅에 머무른 사람들
 1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언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분명합니다. 언어가 존재함으로 사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상이 없는 언어는 없습니다. 또한 언어가 존재하기에 사상과 문화의 전수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찬란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언어였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언어가 하나였기에 모든 사람들은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노아의 후손들은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다른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아라랏 산에서 부터 동방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옮기다”란 말의 히브리어 “나싸”는 원래 “(장막의 말뚝을) 뽑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막생활을 했던 고대의 유목민들이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이동하는 것과 관계있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이주를 하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날 평지는 널따란 평원이었습니다. 시날 땅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으로 말미암아 비옥한 평온을 이루었습니다. 이 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으로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의 한 지역입니다.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10 장 9-10절을 살펴보면 구스의 아들인 영웅 니므롯은 “시날 땅”에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니므롯이 세운 도시가 “바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로 이 땅이 바로 바벨의 문화가 꽃피었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강으로 말미암아 비옥하고 대 평원이 펼쳐진 시날 평지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소결론>
 오늘 말씀에서 시날 땅으로 이주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에덴의 동쪽으로 간 모습과 흡사합니다.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자꾸만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쪽으로 가다가 만난 곳이 시날땅이었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간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2.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시날 땅에 기거하면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바벨론 지역은 평원이었기 때문에 돌보다는 흙이 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 대신 흙을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 문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벽돌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로 진흙을 구워 더욱 단단한 벽돌을 만든 것을 보면, 건축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흙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사건은 문화적인 발전과 기술이었습니다. 당시에 벽돌을 만들어낸 것은 천지개벽할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벽돌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은 동굴 속에 살거나, 돌로 집을 지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돌은 채취 하거나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돌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시날 땅은 돌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을 이기고 불로 구워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혁명이었습니다. 벽돌을 만든 것은 당신의 문화적인 혁명이었고, 그들의 사고 구조와 삶의 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혁명적인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점토로 벽돌뿐만 아니라 그릇도 항아리도 만들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은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역청”은 “끓어 오르다”, “부풀다”는 뜻의 동사 “하마르”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이는 열을 가하면 마치 기름이 끓는 것과 같은 현상을 띤 역청(asphalt)의 특성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역청은 접착제로 오늘날의 시멘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바벨론과 사해에서 역청이 흔하였습니다.(창 14:10) 그래서 시날 평원까지 이주한 자들은 탑을 쌓기 위한 벽들의 접착제로 진흙 대신 이 역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발견해서 누구든지 집을 견고하게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벽돌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한 가지 중요한 시도를 했습니다. 3절에서 (창세기 11:3) “서로 말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창세기 11:4) “또 말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하고자 타인의 동의를 구하는 권위의 말입니다. 이들은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힘을 합쳐 무엇인가를 시도했습니다. 물론 10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일을 주동자는 니므롯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하고자 한 일을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械)과 대(臺)”를 쌓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할 만큼 거대한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 사람이 거주하기에 편리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분명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이 탑을 쌓은 이유에 관해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첫째 이유는 하늘 끝까지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직역하면 “하늘들에 대의 꼭대기가 (있게)”라는 뜻입니다. 왜 이들은 탑을 이처럼 높게 쌓고자 한 것입니까?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행위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하게 될 때, 사단은 인간에게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며 유혹했습니다. 인간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성공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이제 인간의 본능 중에는 신이 되려는 속성이 있고 자기가 높아지려는 죄인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대 유혹은 신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도 마귀는 인간들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악을 범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항하기를 종용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에서 보여주는 영적진리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바벨론의 옛 성터에서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7층짜리 신전인데 “지큐라트”라고 합니다. 조사 결과 그곳은 여러 신들을 숭배하는 신전이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후에 각자 자기가 섬기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예배하는 우상이 하나님을 능가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 탑을 쌓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이었습니다. 



-----<소결론>-----
 아무도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싶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의 의견이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때, 이것이 신의 자리에 앉으려는 속셈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다스려야만 속이 시원한 사람이 영웅심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사람입니다.
 신이 되려는 유혹은 지배욕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섬기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위에 군림하고 싶고 명령하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고 사람을 부리지 말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사람의 정치는 사람을 부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명해지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보다 자신의 명예를 얻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야심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 행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내자는 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소결론>-----
 사람들은 모두 좋은 말로 자신의 마음을 잘 감추고 있지만 모두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갈등 합니다. 모두 자기 실속 채우기에 바쁩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자기가 권력을 갖기 위한 방법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세 번째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있는 무서운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집단과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날 인간 창조 매부터 인류가 번성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온 땅을 채우시기를 원하셨고 또 이를 직접 명하셨습니다.(1:28) 그런데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은 창조자 하나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뭉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창조자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악한 뜻에서 이 같은 시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이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인간의 본질인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하면 안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할까봐 성을 계속 쌓다 보면 결국은 자신이 성안에 갇히게 됩니다. 인간의 운명은 여기서부터 결정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그는 천국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받고 살게 됩니다. 



나가는 말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신(神)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갔습니다. 거대한 바벨탑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가 답답하고 자유가 없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교만과 허영으로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정치, 하나님 없는 과학기술, 하나님 없는 예술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는 바로 바벨탑을 건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바벨론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바벨론의 문화의 정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빌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분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빌 231 참조)

 예수께서는 세상을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 20:28 )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購物)로 주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