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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창세기 8:6-14)

my gospel 2024. 3. 6. 14:30

 

노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창세기 8:6-14)


<37> 노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창세기 8:6-14


한근호 목사


들어가는 말


 지난 말씀(창세기 8:1-5)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심으로 땅의 깊음 샘과 하늘의 창을 닫으심으로 홍수를 그치시고, 바람을 일으키심으로 물을 감하게 하시는 장명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물이 급속히 감소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6-14) 물이 빠지는 장면입니다. 방주 속에 있던 노아가 물의 감소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바깥으로 날려 보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8장 / 개역개정)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가운데 말


1. 까마귀를 내어 보내다.
 (창세기 8:6-7)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노아는 직접 먼 곳의 지면까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땅에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땅이 얼마나 말랐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내보냈습니다. 창문은 방주 위쪽 측면에 지은 것으로 여닫을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창세기 6:16)  노아는 짐승들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낸 것은 이 새는 썩은 것이라도 음식으로 섭취할 수 있는 왕성한 생명력 때문에, 만일 물이 말랐다면, 이 새는 진흙 속에 파묻힌 짐승의 시체라도 먹고 방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아의 예상대로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산봉우리들과 짐승의 시체들이 휴식처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으므로, 방주 속으로 돌아오지 않고 방주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던 것입니다.



2. 비둘기를 내어보내다.
 8-9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8:8-9)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노아는 땅의 상태에 관한 더욱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번에는 까마귀 대신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귀소성(歸業性)이 강한 새이므로, 노아는 이 새가 바깥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증거를 갖고 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비둘기는 주로 평지나 골짜기를 즐겨 찾는 새로서, 마르고 깨끗한 장소에만 앉는 습관이 있습니다. 비둘기가 진흙 위에서나 불결한 시체 위에는 앉지 않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돌아다니다가 앉을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비둘기가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비록 물이 빠졌다고 할지라도 땅이 아직 덜 마른 상태로서 여전히 진흙투성이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메튜헨리(Matthew Henry)는 여기 까마귀와 비둘기의 사건에서 영적 진리를 간파하고 있다. 즉 까마귀는 교회(방주)를 떠나 세상과 벗 삼으며 거기서 썩은 고기를 먹는 타락한 영혼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부패하고 더럽혀진 세상에서 평안을 찾지 못하고 교회(방주)로 나아와 그곳에서 참된 휴식과 평안을 누리는 경건한 영혼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비둘기는 은혜의 영혼을 상징한다. 발을 붙여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범람하여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확고한 화평과 만족을 찾을 수가 없어 그의 방주요 노아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육욕에 찬 마음은 까마귀와 같이 이 세상을 벗 삼고 그곳에서 찾아낸 썩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인 노아에게로 돌아갈지어다" (시 116:7)라고 성서는 말한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그에게로 날아 가리라(시 55:6). 노아가 그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속으로, 곧 자기에게로 끌어 들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로 날아드는 자들은 은혜롭게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환영하여 주실 것이다.



3. 비둘기가 감람 잎을 물고 오다.
 10~11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8:10-11)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비둘기가 처음 돌아온 후에 노아는 칠일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두 번째 돌아왔을 때는 비둘기는 입에 새로 돋아난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새”(new)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라프”의 본 뜻은 “뜯다”, “찢다”, “꺾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는 비둘기가 홍수 후에 새로이 돋아난 감람나무 잎사귀를 뜯어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감람나무는 산의 높은 정상에서 자라지 않고, 주로 저지대의 수표면(水表面) 위에서 자랍니다. 그러므로 비둘기 입에 감람새 잎사귀가 물려있다는 사실은 낮은 지역에 까지 물이 빠졌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노아는 골짜기들이 풀과 채소와 과목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감람나무 잎사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마구 먹는 까마귀나 음탕하고 교만한 공작이 아니라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겸손한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왔습니다. 영혼 속에 평안과 기쁨의 증거를 가져다주는 것은 비둘기와 같은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 대의 모양이었던 비둘기처럼 그의 복음을 내보내셨다. 이 복음은 우리들에게 감람 잎사귀를 가져다주어 보다 좋은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홍수 심판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평화의 메시지로서, 곧 새 생명과 새 시대의 도래와 땅의 부활을 의미하는 첫 표식이었습니다. 

<소결론>
 노아는 까마귀를 내어 보내고, 비둘기를 내어 보내는 것을 통해 바깥 상황을 면밀히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이라기보다는 삶의 지혜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고민하고 탐색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겠지 하며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4.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더라.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새잎을 보고도 방주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8: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그 후에 노아는 다시 칠일을 기다리고 나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갈 곳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노아는 물이 거의 완전히 빠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 노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13-14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8:13-14) “육백 일 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 일에 땅이 말랐더라” 노아는 마침내 방주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노아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이쯤 되면 보통사람들이라면 뚜껑을 열고 방주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방주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가 매우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땅에 내려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할 바를 지시하실 때까지 끈기 있게 방주 안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에게 임했습니다. (창세기 8:15-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노아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들어가라고 말씀하셔서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올 때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나오라고 말씀하셔서 나왔습니다.



<소결론>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노아는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보다 앞서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움직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신앙이란 기다림입니다. 기도 하는 대로 즉시 응답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로 기다려야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는 모든 신자들에게 크게 필요한 미덕입니다. 야고보서 5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신자가 인내해야 할 필요성은 또한 히브리서 10:36-39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히 10:36-39)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나가는 말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균형 잡힌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의 조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행동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노아의 모습에서는 이 두 부분에 적절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어느 성향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지를 보고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동해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가, 어떤 사건 사건마다 수학 답이 나오듯이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머무르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드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로 나가기
 하나님, 저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대로 추측하여 우리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인 양 행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조급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행치 않게 하옵소서! 인내함으로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미적미적하지 않게 하시고, 사자처럼 담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