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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 (창세기 7:1-5)

my gospel 2024. 3. 5. 17:51

 

방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 (창세기 7:1-5)


<31> 방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

창세기 7:1-5


 한근호 목사


들어가는 말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고,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7장 / 개역개정)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가운데 말

 
1. 방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난 후, 장장 120년에 걸쳐서 방주를 건조했는데, 창세기 7장에 이르러 비로소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노아는 또한 방주에 실을 모든 식량과 필수품들을 비축하였습니다. 노아는 비록 그 방주가 자신의 피난처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때는 노아의 나이 600세였으며, 대홍수가 일어나기 7일 전이었습니다.(4절) (창세기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노아에게 온 가족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곧 대홍수가 시작될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이 말씀은 안전한 지대로 노아와 그 가족을 초대하신 은혜로우신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폭풍우의 조짐을 예감한 어머니가 자녀들을 집 안으로 모아들이듯 하나님께서는 대홍수가 임박하자 노아를 불러들이셨습니다.  노아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의 온 집안, 즉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그와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아들 중에 함이 있었는데 그는 후에 악한 자임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방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가장 선한 사회 속에도 선과 악의 섞여 있다. 이것을 우리는 기이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가정에는 함 같은 존재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권속 중에는 유다가 있었습니다. 즉 인간 세계는 완전한 순결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소결론>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이 은혜로우신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노아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노아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부르시는 복음의 부름의 한 모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예수님께서도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라”고 부르십니다. 성령님께서 이르시기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수 천 년 동안 인류에게 되풀이되는 부르심은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해서 “오라, 오라” 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방주로 들어오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련된 방주가 되시니 그 안에서만 우리는 죽음과 심판이 닥칠 때에 안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결론>
 노아 방주의 기능은 '구원'에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 방주는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표 합니다.



2. 의로운 노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창세기 7:1b)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노아의 의로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은 바로 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아는 그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믿음에 의해서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서도 노아가 의로운 자가 된 근거를 맨 처음 기록된 “믿음으로”라는 말에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즉 그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가 행한 업적이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행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3. 예배의 삶을 살라.
 (창세기 7:2-3)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짐승과 새를 방주 안에 들이도록 명하셨습니다. 6장 19 절에는 (창세기 6:19) “암수 한 쌍씩 들어가도록”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여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모든 종을 보존케 하기 위하여 암수 한 마리씩 남겨 두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의 목적은 3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짐승들로 그 씨를 보존하여 유전케 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연계에 대한 창조의 영광과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7 장 2 절에는 (창세기 7: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구절이 모순이라고 생각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6장 19절 말씀은 방주에 들어가야 할 최소한의 암수 한 쌍을 언급한 것이고, 7장 2 절 말씀은 기본에 특별히 정결한 짐승을 첨가하여 암수 일곱씩 취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은 일곱 마리씩 방주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결한 짐승은 번식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 7:2) “정결한 짐승, 부정한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짐승의 “정(淨) ․ 부정(不淨)”을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후일에 모세 율법(레 11장 ; 신 14장)에서 이러한 구분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식용(食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제물용(祭物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즉,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의미합니다. “암수 일곱씩”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 ① 일곱 쌍-총 14마리-이라는 견해 ② 암수 도합 7마리-세 쌍과 한 마리-라는 견해입니다. 이중 후자의 견해를 채택한다면, 여분의 한 마리는 분명 제물용으로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제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의 후반부에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제사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8장에서 홍수가 그치고 지면에 물이 마른 후,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정결함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8장 20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도 정결한 짐승을 일곱을 취한 목적이 제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할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원하셨습니다. 제사는 예배를 말합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소결론>
 인간이 타락한 뒤에 반드시 해야 할 가장 고귀한 삶의 의무는 예배의 의무입니다. 예배는 피조물된 인간이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경배해야 하므로 의무입니다. 예배는 또한 인간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인간이 그 타락성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에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도 죄인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감옥도 영광의 자리로 변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과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 최후통첩
 (창세기 7: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120년 동안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된 120년이 끝난 것입니다. 마침내 노아와 그의 가족들, 또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갈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120년이 흘러가고 마지막 한 주간을 남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선포하셨습니다. (창세기 7: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이는 홍수 심판을 예고하는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이제 7일 후면 홍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소결론>
 120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7일이라는 여유를 더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아기를 더디 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보다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은혜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5. 최후통첩을 거절한 사람들
 이에 부응하여 노아 역시 이 7일 동안 전심전력으로 회개의 촉구와 방주 승선(乘船)을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헛되었고 이 7일이라는 날도 다른 모든 날처럼 헛되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닥쳐올 때까지 계속해서 태평하여 육욕에 젖어 있었습니다.



<소결론>
 이것은 마태복음 24:38, 39의 말씀과 매우 일치합니다. (마 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이 재림하시는 그 시간에도 사람들은 노아의 시대와 똑같이 회개할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성경 증언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상황이 더욱 긴박한 지경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세상 위에 오신 그 순간에도 불신자들은 여전히 믿음을 거절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