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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씨의 보존 _ 셋과 에노스 (창세기 4:25-26)

my gospel 2024. 2. 22. 10:45

 

거룩한 씨의 보존 _ 셋과 에노스 (창세기 4:25-26)


<22> 거룩한 씨의 보존_ 셋과 에노스

창세기 4:25-26


한근호목사


들어가는 말

 지난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이 세속적이며 방탕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서는 인류의 구속자를 보내주실 수 없을 만큼 타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런 모습은 참으로 암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만 보면 참으로 암울한 것 같으나, 성경은 그다음 기록에서 한 줄기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과 그 후손에 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4장 / 개역개정)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운데 말


1. 셋의 계열
 “셋”은 “놓다, 지정하다, 안정되다”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 곧 “정해진 자, 안정된 자”란 뜻입니다. 이는 셋이 아벨 대신 보상으로 “주어진 자”란 뜻이요, 유리하며 피하는 가인과는 달리 “안정된 자”란 뜻입니다. 셋이 아벨 대신 주신 자라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은 뒤, 아담이 나은 셋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언하신 바 있는 여자의 후손(3:15)을 나오게 할 혈통으로 셋을 출생케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셋의 출생은 아벨의 죽음으로 인해 어두웠던 인류 초기 역사에 구속사적인 면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하향식이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상향식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셋의 계열에서(후손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눅 3: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셋은 영광스럽게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단의 세력을 이길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위한 구속사적 계보(救蹟吏約 系諮)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실로 큰 의의를 지니는 것입니다. 



<소결론>
 오늘 말씀은 아벨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멈춘 것 같고,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이 번창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에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로 소중한 내용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암울해 보일지라도,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멈추지 않으시고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개인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깊은 절망에 처해 있을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을 승리의 인생으로 이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에노스
1)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
 (창세기 4:26a)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는 “흙”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연약하다, 순간이다”라는 뜻입니다. “에노스”는 “사람, 병든 사람, 죽음 ․부패로 사라져 갈 사람”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이 아들의 이름을 이러한 의미로 지은 것을 보면, 그는 인간의 연약성과 순간성을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철저히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셋은 이러한 인간의 부족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셋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가인 계열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창세기 4: 26b)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주된 원인은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 신(神)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인간의 연약하고 추악한 모습을 깨닫는 그 순간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소결론>
 사람들은 강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의 강함은 그 사람에게 저주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죄 많음을 깨닫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얻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기에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간의 부패를 알기에 우리를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이때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참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창세기 4: 26b)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입니다.(12:8; 13:4; 21:33; 대상 16:8; 시 105:1)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께 공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셋과 에노스에 대한 기록은 실로 간결하나,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셋의 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배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의 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된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셋의 후손들이 전혀 성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거나 혹은 그들이 전혀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셋의 후손들이 구원이 필요치 않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세상 가운데 살았을지라도 세상적인 일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면서 살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가계와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인의 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된 것은 세상에 속한 일들이었습니다. 가인의 가계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앞선 16-24절에 있는 가인의 후예들에 대한 말씀에서는 세속적 인간 문명의 발전이 묘사되어 있었으나, 여호와의 이름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소결론>
 인생이 추구할 제일 목적은 세상적인 위업을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소유와 많은 권력과 많은 명성과 많은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기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데 있는 것인가?” 세상에 속한 일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릇된 것이 아니다. 단지 세상에 속한 일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도록 그들이 허용하기 때문에 그릇되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3. 구속자를 기다린 사람들
 (창세기 4: 26b)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습니다. 초기 고대 사회에서 널리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었습니다. 이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속자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 즉 “구속자 하나님”으로 부른 것은, 그들은 그들의 타락을 알았고, 그들의 잃어버린 상태를 인정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에게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셋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은 미래에 여자에게서 태어날 구속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구원자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구속자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0:9-13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롬 10:9-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소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보내주시며 약속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다시금 재림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기도로 나가기>

 하나님,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예배할 수 있도록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평생 동안 더 깊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부르고 높일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