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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_ 아담의 아내 (창세기 2장 18-22절)

my gospel 2024. 2. 14. 14:17

 

결혼 _ 아담의 아내 (창세기 2장 18-22절)


<13> 아담의 아내

 창세기 2:18-22

하늘문교회 한근호 목사


(창세기 2장 / 개역개정)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1.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 창조 세계가 좋았더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창조사역을 마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2)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더라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창세기를 1장부터 본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여기에 처음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고 (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하와를 창조하셨는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창조하신 것이 분명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했습니다. 그것을 바로 하와가 빠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뒤늦게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하와를 창조하셨는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부부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홀로 있는 Single의 시간을 갖게 하셨는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2. 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 돕는 배필의 필요를 느끼는 아담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 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맡기신 창조 과제는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을 아담 앞으로 지나가게 하실 때, 하나님과 아담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동물들이 그 앞을 지날 때 아담은 적절한 이름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짓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이름을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무조건 붙여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들의 특성이나 다른 동물들과 관계를 자세히 살피고 그 후에 적절하게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다름 아닌 현재의 생물학자들이 하는 일을 하도록 요청을 받았던 것입니다.
 
2) 돕는 배필의 필요를 느끼는 아담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사역을 하면서, 한 가지 깊은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모든 동물들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또 그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자기에게 어울리는 동반자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이었습니다. 20b절에서 (20b)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은 자신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동물 가운데서는 자신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동물들에게는 혼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에게도 지각이 있고, 개체성에 대한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아담이나 동물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담이나 동물이나 공기를 통하여 호흡을 하며, 또 기본적인 생명 현상이 대동소이합니다. 모두가 움직이며, 행동하며, 다른 개체와 관계를 맺으며, 또 특정한 자극에 대해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동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강조점입니다. 동물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영적인 수준에서는 대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혼한 상태로 창조하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은 하나님의 사역을 홀로 감당하는 가운데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동반자가 될 존재가 지금까지 본 피조물 가운데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아담은 동물들의 행진을 보면서, 이 동반자는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하게 새로이 지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아담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아내에 대한 진정한 필요였습니다.
 
<소결론>
고독한 삶
Single의 삶
 
 외로움만큼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방에 감금된 죄수들은 거미를 보고도 기뻐 어쩔 줄 모른다고 한다. 거미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끔찍할 정도로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 기술적인 진보는 삶의 많은 영역에서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했다. 점차적으로 기술은 사람을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노인들은 양로원에 수용되고, 공장 노동자들은 최첨단 로봇에게 밀려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헤매지만 자포자기하여 그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떤 사람은 정신 치료사나 정신과 의사의 도움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과 마약, 자살에서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서 단절된 채 많은 사람들이 깊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단절된 삶은 이렇듯 하나님이 뜻하신 연합을 파괴하며 결국 절망으로 이끈다.
 


 
3.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
 
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이제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짝지어 주신 것은 창조 사역의 절정이었습니다. 이 귀한 존재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21 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갈빗대”라는 말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의 『쩰라』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옆에서” (side) (side)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갈빗대를 취했다는 말이 아니라 옆에서 무언가를 빼내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경학자는 주경 (註經) 하기를 “그래서 아담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라고. 곁에 누군가가 있지 않고는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돕는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18절의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은 영어 성경에서 “a helper suitable for him”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에게 적합한 돕는 사람” 이란 말입니다. 아담의 진정한 짝이 될 수 있는, 아담에게 적합한 돕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아담에게 적합한 반려자로 귀한 여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소결론> 서로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자
 18 절에서 “돕는 사람”(helper)은 하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자는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에젤』이라는 남성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돕는 사람”은 하와뿐만 아니라 아담에게도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흔히 “돕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 단어가 그리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엉뚱한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사람만이 돕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46 1 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 말씀에도 『에젤』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약한 분이 아닙니다.
 
 진실로 강한 자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부부는 “상대방을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상대방을 위해 존재할 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부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하여 존재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부간의 비극,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 때 시작됩니다.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고 비극의 씨앗인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부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한 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배우자를 위해서 돕는 자로,,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함께하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suitable”이라는 단어도 사실은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suitable for him”이라는 표현 대신 “correspond to him”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정서와 마음과 생각이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부부는 서로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통한다’는 것은 특별히 대화가 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 “suitable helper”, “corresponder” 따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크네그도』입니다. 이 단어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옆에 있든 앞에 있든 간에 가까이 있어서 서로 말하고 듣는 상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셔서 부부가 된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또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결론>
 수년 전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대체로 건강한 부부들을 상대로 “얼마나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는가?”라는 조사를 했는데 평균 10 분도 안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건강한 부부도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대부분 평범한 부부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루 24 시간 중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인데 겨우 10 분밖에 대화를 나누지 않겠냐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 우리의 눈물, 고독, 상처, 절망, 기쁨 따위를 부부가 얼마나 잘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깊이가 결정됩니다. 대화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부부는 특별한 친구입니다.
 
 당신은 배우자와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부부는 두려움 없이, 꾸밈없이, 정직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줄 아는 부부입니다. 서로를 용납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부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안에 그분을 더 가까이 닮아 가려는 본능적인 갈망을 심어 놓으셨다. 이 갈망은 우리를 사랑과 공동체와 일치를 향해 가도록 재촉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에서 이 갈망의 중요성을 지적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너(thou)’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창 4:8-10).(창4:8-10).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공동체를 발견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 돕기 원하신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가장 깊은 마음과 만날 때,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우리의 도움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형제를 사량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 우리의 삶은 사랑이 불을 밝히고 증명되고 결실을 맺을 때만이 충만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두 가지 중요한 명령을 하셨다. 이 두 명령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경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없다(요일 4:19-21).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반드시 우리의 형제자매를 통해 있다. 그리고 결혼 안에서는 우리의 배우자를 통해 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결코 외롭거나 장기간 움츠려 있을 수 없다. 즉, 우리는 항상 사랑해야 할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그들을 찾는 것이다. 최근 우리 공동체의 한 젊은 형제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설 때 그가 발견했던 새로운 기쁨을 내게 말해 주었다. 그 형제는 한동안 볼티모어(Baltimore)에 머무르며 불우 이웃을 위한 주택 건설 사업에 자원 봉사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가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대개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거듭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돕는 형제자매가 되어야만 한다. 이런 사랑을 위해 우 리의 굳어버린 마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리고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겸손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돕고 의지하고, 보완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여자를 남자에게 그리고 남지를 여자에게 데려오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셨을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기쁨과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발견해야만 한다.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심으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참된 소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신다. 그 소명은 돕는 자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므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외롭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18-21).
 
 누가 이 말씀의 깊이와 이 말씀이 오늘날의 혼란한 세상에 가져오는 희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외롭고 가장 절망하고 가장 환멸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누구보다 확신해도 좋다. 인간적인 우정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을 계속 붙들고 있는 한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남녀 홀로 느껴야 하는 외로움을 치료하시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서로 보완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도 동일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만 결혼 그 자체가 온전함(wholeness)을 가져올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며 희망이며 생명이신 그분을 사랑할 때, 남녀는 서로를 온전히 알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내적으로 고립시킨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이다. 그분만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있다.(골 1:17-20).
 
 하나님은 참된 사랑의 원천이며 대상이다.
 결혼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목표는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먼저 우리가 그분을 사량하고 다음으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곳에서 가장 뚜렷하고 완전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결혼 안에서 남면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아내와 자녀를 인도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지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해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과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은 단지 의무가 아니라 선물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재발견했더라면 우리의 관계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는 두려움과 불신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있는가? 공동체와 교회를 세우는 그런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이기심 없는 사랑이다. 두 번째 사랑은 자기만 알고 소유하려는 사랑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영혼의 자아이며 영혼의 손입니다. 어느 하나를 꼭 쥐고 있으면 다른 것은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주는 무엇을 잡으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주고 희생하는 사랑이다. 그것이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새롭게 붙잡아 주시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그 사랑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들과 나누게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사랑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절망은 자기애(self-love)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절망은 한 인간이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고의로 등을 돌리지만 결국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린 것을 발견함으로써 썩어 냄새나는 ‘쾌락’ ‘쾌락’을 맛보게 될 때 경험하는 것이다. 
 절망은 교만이 발전한 궁극적인 결과이다. 인간이 목이 곧을 대로 곧아 교만이 극에 달해서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행복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다는 것과 우리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끔찍하고 비참한 저주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절망할 수 없다. 겸손한 자는 더 이상 자기 연민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손은 그 반대로 사랑으로 이끈다. 사랑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생명을 향하여,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여 ‘예’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만이 인간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다.



4.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잠에서 깨어난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이상한 존재를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습니다. 아담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눈이 빛나기 시작하고 온몸에 이상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무엇이었을까요 ? 바로 ‘여자’였습니다. 아담은 즉각적으로 하와가 자기의 동반자임을 알아챘습니다. 최초의 여자를 본 아담의 느낌은 참 놀랍고 가슴 벅찼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둘이 본질적으로 닮았고 연합되어 있음을 축하하면서 말하는 감탄사입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의 사랑의 고백 뒤에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 제도, 가정의 창조에 대한 말씀이 잇따라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부부, 에덴동산의 부부가 되려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언뜻 육체의 연합만을 생각합니다. 사실입니다. 부부 사이에 성적(性的)인 교제는 부부가 하나 됨을 상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몸 됨이 육체의 차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靈) 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도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과 영의 합일 (spiritual oneness), 영적인 하나 됨 없이는 부부가 하 나 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결합 없이 육체의 연합만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부는 결코 참된 일치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부부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충족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부부 중 한 사람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일 때, 그 두 사람의 영은 일치감을 맛볼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말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은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며, 함께 헌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높이는, 영혼이 하나 된 부부들입니다. 결혼 생활의 행복은 육체만 아니라 영혼이 하나 될 때 찾아옵니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짝지은 부부는 하나가 되었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소결론>
세상에 죄가 들어온 뒤에 인간들은 부끄러워하기 시작합니다. 죄가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남편과 아내 사이에 단절이 생겼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소외감과 갈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부부 관계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에덴동산의 부부의 모습으로 회복되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부부 생활의 행복을 다시금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죄를 사함 받고 부부가 함께 살아 계신 주님을 섬길 때 깨어진 부부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회복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고후 5:17 참조).
 
 열쇠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당신 가정의 주인이 되셨다면, 그 부부 생활은 창조 당시 에덴동산에 살던 부부와 같이 서로 돕고 친구가 되며 육과 영이 하나 되는 삶일 것입니다.
 
<소결론>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어떤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만약 남자가 몸, 혼, 영이 삼위일체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남편과 아내는 이 세 가지 면, 즉 몸, 혼, 영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과 몸의 연합은 성적인 연합을 통해서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결혼관계가 오직 성적인 관계를 근거로 이루어진다면, 이 결혼은 허약한 것입니다. 육체는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풍만한 몸은 노쇠해지게 마련인데, 만약 육체적인 관심 때문에 결혼했다면, 이럴 때 부부는 서로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되고, 이혼하거나 간음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육체적 매력만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결혼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혼과 혼의 연합을 이루는 결혼입니다. 이는 사람의 속성 가운데서 지성적이며 정서적인 측면에 관계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음의 여러 기능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통상적으로 말하는 성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혼의 연합을 포함하는 결혼은 부부가 같은 일에 관심을 갖는 결혼입니다. 책에 대한 관심, 같은 취미, 친구에 대한 관심 등입니다. 여기에는 지성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영과 영이 연합하는 결혼에서는 마음이나 혼의 연합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쉽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영적인 결혼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육체적이며 혼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결혼한 쌍들이 완전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서로에 대하여 이전에 생각한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상대방이 달라지기를 원하며, 또는 다르게 만들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기준들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두 번째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배우자의 관심과 소망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면서, 상대편에 대하여 자기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진정한 연합은 영과 영이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는 남편과 아내가 모두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다른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결혼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한다면, 당신은 의도적으로 불행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그러한 결혼에 함께 하지 않을 것이며, 이럴 때 당신은 가장 값진 것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이 경우는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부친 다윗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으며, 둘째는 솔로몬 자신이 주의 길로 행하기를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전 건축이 끝나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영화롭게 지내게 되면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여인 중에 애굽 바로의 딸도 있었습니다. 이는 솔로몬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공주는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역대하 8:11 8: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하 8:11)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나는 이 여인이 내가 하나님에게 진실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내가 이 여인을 다윗의 궁이나 성전에 데리고 들어갈 때에는 언제나 죄책감을 느끼며, 나의 양심은 가책이 되어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유일한 해결책은 이 이방 아내를 위하여 다른 궁을 하나 더 짓는 것이다. 나 또한 격리된 궁에서 가능한 한 자유로운 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한다면, 솔로몬의 경우가 바로 당신의 경우가 될 것이다. 당신이 비그리스도인인 배우자를 전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구원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이러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오랜 해를 슬픔과 고통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있다면, 결혼하기 전에 당신의 상대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또 약혼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권위로써 말하는데, 그 사람은 절대 당신의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 6:14-16)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여러분은 아마 몸과 몸의 결혼과 혼과 혼의 결혼을 자연스럽게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 영의 결혼을 갖지 못한다면 진정한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결혼은 신성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결혼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justice)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독특한 결속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신다.
 
 결혼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 이상이다.
 신약성서에서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과 일치(unity)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신랑에 비유되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 19:7-9)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수님이 결혼을 기쁜 일로 여기신 것은 분명하다. 그와 동일하게 예수님에게 있어 결혼은 분명히 성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결혼을 파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반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9).
 
 이런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간음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간음이라고 불렀던 선지서(렘 13:25-27)13:25-27)로부터 음녀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기록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간음에 반대하고 있다. 결혼의 결속이 깨어질 때, 간음한 자와 배우자 사이의 사랑-두 사람 사이의 영과 혼의 일치-도 깨지며, 동시에 간음을 저지른 자와 하나님 간의 사랑도 깨진다.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결혼제도는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결혼한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함께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부부들은 희생이나 서로 간의 정절 없이도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또한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길 두려워한다.
 
 수백만의 결혼관계가 파괴되고 허우적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이 세상을 향해 정절과 헌신을 외치고 있다. 우리 각 사람 내면 깊은 곳에는 정절(faithfulness)로 돌아가라는 억누를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 모두 안에는 다른 사랑, 또 다른 너(thou)와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일치되길 바라는 갈망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틀림없이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참 만족과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때 찾아온다. 하지만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내가 만일 어떤 사람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가질 것이고, 나 혼자만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나오고 싶어 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우선은 하나님을 향해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전히 각성하고 눈을 뜰 수 있도록 사랑과 겸손 안에서 도울 것이다. 참된 사랑은 결코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정절과 순결의 자유로 이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충실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충실하심을 반영한다. 모든 참된 결속을 가져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충실하심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를 사랑하고 각자의 은사로 서로 도울 힘을 발견한다. 교회의 사랑과 일치 안에서 모든 형제와 자매는 한 영(spirit)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마음(heart)과 한 뜻(soul)이 될 수 있다.(행 4:32)
 
 성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사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약혼 혹은 결혼한 부부의 사랑과 그렇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결혼만큼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 깊이 의존하는 관계는 없을 것이다.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 곁에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은 아주 특별하다. 그리고 떨어져 있을 때조차 둘 사이에는 독특한 결속이 존재한다. 부부간에 누리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얼굴에까지 드러난다. 폰 가건 (Von Gagern, 독일 가톨릭 정신치료사)은 이렇게 말한다. “종종 남편은 오직 아내를 통해 참된 남자가 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통해 참된 여성다움을 얻습니다.”
 
 참된 결혼관계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배우자의 행복과 성숙을 위해 애쓰는 관계이다. 서로를 보완함으로 둘 사이의 연합은 증진된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정절과 풍성한 결실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신비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결혼의 독특한 결속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된다는 것의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분명히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주고 완전한 하나가 되어 마음과 몸과 영혼이 함께 묶이고 녹아진 두 사람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이다. 그들의 연합은 동반자 의식이나 동료 의식을 능가하는 열매이며 가장 깊은 친밀함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적고 있듯이,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두 사람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이 연합은 그것을 이루어낸 두 사람 이상의 무엇이 된다. 이 연합은 서로에 대한 경외감이며, 그런 결심의 완성에 대한 경외감이다.”
 
 오직 이런 경외감과 하나 됨 안에서만 결혼은 성적인 양심의 요구들을 채울 수 있다.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려는 의지를 통해서, 그리고 피조물과 그의 백성간의 연합을 반영하는 부부간의 일체감을 통해서, 결혼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시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하나님이 결혼의 중심에 계실 때, 마음과 영혼과 몸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결혼 질서 안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경험의 수준이 있다. 첫 번째 수준은 가장 놀라운 수준으로 영혼의 연합, 하나님 안에서 마음과 뜻의 하나 됨이다.. 이런 하나 됨 가운데에서는 배우자뿐 아니라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은 감정의 수준의 연합으로,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의 교감은 상대방의 심장박동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마지막 세 번째 수준은 육체적인 결합인데, 그것은 두 몸이 완전한 연합 속에서 융합할 때 나타나는 하나 됨의 표현이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부부들이 두 번째나 세 번째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육체와 감정에 근거한 결혼은 실망과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감정적인 매력이나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얼마 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자란 한 여성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자매와 남편은 공동체의 정회원이었는데 정회원이 된 목적이 단지 결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는 정회원 서약을 한 후에야 결혼을 할 수 있다). “남편과 저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혼 전이나 후에라도 서로의 기대에 대해 결코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많이 달랐답니다.” 결국 남편은 아내와 다섯 자녀를 버리고 떠났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은 무엇이 잘못 됐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헌신이 그리스도 안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견고하고 영구적인 토대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결혼이 참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세워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영과 마음과 뜻의 일치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질서를 따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참된 약혼과 결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경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잠자고 먹고 마시는 감각의 세계 속에 살면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우리의 내적인 삶으로 돌아갈 시간을 결코 마련하지 못한다. 결혼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섹스만이 주요 관심거리가 되어 버렸고 서로 한 마음이 되는 문제는 포기한 지 오래고 더 이상 거론하지도 않는다. 일평생 서로에게 충실을 지키는 부부가 몇 안 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바닷가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밀물과 썰물로 인해 수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의 힘에 대해 배우게 된다. 결혼생활과 우정관계 안에서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 관계가 바닥을 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인내심을 잃거나 배우자와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 사랑을 소생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그에게로 돌아가 가장 낮은 바닥에서 조차 믿음과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것과 그의 계명이 우리를 빚어 가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계명이 해괴한 법이나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참된 본성을 그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대로 지켜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배반하고 파괴하면 할수록, 그의 통치는 낯선 것으로, 우리를 짓밟는 도덕적인 강요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사랑 안에서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서로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 아이를 낳아 함께 결실을 맺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결혼 생활을 복되고 거룩하고 기쁘게 만드는 것들이다. 사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의 축복을 주셨다. 바로, 아담에게 동반자라는 선물을 주신 일이다. 이 선물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형상이 너희 안에 살아있느니라.” 결혼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이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부부사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잠재하며 원래 모습대로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아담을 보시면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좋지 못하다”는 구절이 처음으로 나오는 데가 바로 여기입니다.. 고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