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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my gospel 2024. 2. 13. 13:33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1> 창조주 하나님
창 1:1

하늘문교회 한근호 목사

들어가는 말

신․구약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의 각 권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그 문학 형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 성경 66권 전채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유기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구속의 원리에 대해 통일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모두는 상호 관련을 가지므로,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 각 부분을 조망하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는 성경 가운데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시작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창세기에 대한 이해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실로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묘판(苗板)이며 모든 기독교 신앙 체계의 직 ․간접적 출발점이 되는 교리의 모태(母胎)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처음 장들은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기록입니다. 앞으로 창세기 1-11장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1장 1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 개역개정)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가운데 말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무슨 책이든지 서론이 있고 설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시작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선언이 있을 뿐입니다. 놀랍고 신비스럽고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설명도, 변명도, 논리의 전개도, 설득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는 논쟁하는 책이 아닙니다. 세미나를 하거나 연구하는 책이 아니라 선포하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우구이시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적용> 선포 앞에 복종하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의 선포를 믿고 고백하면 창세기가 전부 열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이 고백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일도 간단합니다.
 



1. 하나님(엘로힘)
1) 하나님
성경은 맨 처음 “태초에 하나님”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말씀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에서 ‘태초에’라는 말을 빼고 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가 됩니다. 이 말씀을 더 줄인다면 ‘천지를’이라는 말을 빼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압축해서 ‘창조’라는 말을 빼면 ‘하나님’ 만이 남습니다. 이 구절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주 만물의 중심과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주어로서 자연히 성경 전체의 첫 번째 주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첫 주제가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거룩한 정경의 첫 문장은 모든 참된 복의 무한한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는 자세한 논증이 없다. 성령께서도 어떤 종류의 논증도 생각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41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1절부터 4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
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잠언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때에야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인생과 우주만물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세미나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책에 계시거나 도서관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배하고 찬양할 때 그분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논쟁하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내게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가까이 가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8을 보면 네 생물이 나타납니다.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
이 생물들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24 장로들이 보좌에 계신 그분에게 면류관을 던지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참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며,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흰 옷을 입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며 경배하는 놀라운 찬양의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1장 1절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적용>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
본문의 주어는 ‘나’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될 때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모든 문제가 안개같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능력과 신묘막측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중심의 축을 인간중심으로 바꾼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유혹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조금만 권력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있게 되거나 남보다 돈이 많거나 똑똑하다는 말만 들으면 신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유혹은 다른 사람을 종으로 만들려는 지배욕에 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고 명령하고 통치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의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 사상에서 가장 우리를 헛갈리게 하는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굉장히 멋있게 느껴지지만 휴머니즘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권이 우상이 되면 신권이 없어집니다. 인본주의가 있으면 신본주의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질문 하나를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혹은 여러분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혹은 ‘하나님은 남자야 여자야’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자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그는 영원 전에 계셨습니다. 영원 후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있습니다. 그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는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응답해 주시는 그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으십시오. 선포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고 창세기 여향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2) 엘로힘- 강하고 전능한 분
󰃨 하나님(*, 엘로힘). - ‘두려워하다'(*, 알라) 혹은 '강하다'(*, 울)란 뜻에서 파생된 말로 곧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 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 존재'란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한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하나님에 해당하는 원어 “엘로힘”은 “강하고 전능한 분”이란 뜻을 가진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엘로힘” 명칭은 창세기 1장에서만 무려 32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약 2,500회나 나옵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으로 끝을 맺고 있는 셈입니다.



3) 복수형이면서 단수처럼
󰃨 하나님(*, 엘로힘). -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하'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多神論的)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를 삼위(三位)이시나 일체(一體)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또한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도 있다.
 
특별히 신명칭이 복수 형태로 되어 있는 점은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나 일체(一體)이신,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시사해 주는 명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2.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1) 태초에-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태초에(*, 베레쉬트). - 70인역은 이 말을 요 1:1과 같이 '영원부터'란 뜻을 지닌 '엔 아르케'(*)로 번역했으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開始)함로써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太古史)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한다. 한편 공동 번역은 이 말을 '한 처음에'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한'은 천지 창조의 단회성을, '처음'은 만물의 출발점을 각각 강조하는 말이다.
 
“태초에 하나님”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는 “바로 그 시초에”란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중 먼 과거에”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의 출발점 자체 즉 역사가 시작된 바로 그 시초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과거의 어느 시점, (우리식의 표현으로 빌리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간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시간과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간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구절 속에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만물과는 분리되어 계심과 동시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만물 안에 개입하시게 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증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며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태초에’라는 말에 있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인간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있다는 말은 공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간이 없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는 공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을 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한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간이 기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해는 곧 시간이해입니다. 시간을 잘 이해할 때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생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사탄에게 준 사람들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잘 선용한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시간이요, 축복된 시간이요, 천년 같은 시간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파멸의 시간이 됩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어떻게 쓰이느냐 또는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접붙여질 때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시간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가운데 거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2) 창조하시니라
󰃨 창조하시니라(*, 바라) - 구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 나온다. 첫째 여기서 사용된 '바라'는 무에서 유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킨다. 그러나 때로는 특수한 목적으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거나 만드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둘째,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셋째, '야찰'(*)은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 것을 가리킨다(2:7.9).
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본장에서 '바라'.'아사', '야찰'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구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그 예로 '바라'는 (1) 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 그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책인 성경은 정확무오한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된 그야말로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는 책임을 새삼 인지할 수 있다(마 5:18). 즉 우리는 '바라'뿐 아니라 모든 성경 원어를 분석, 연구할 때마다 성경은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된 책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성경 총론, 성경의 영감). 이제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창조하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의미와 그 기사의 정확성을 간추려 보자. (1)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며 (2)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3)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다(시 33:6-9; 렘 10:12). (4) 또한 이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일소시켜 준다. '창조'라는 개념조차도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와 기존물질을 변형하여 새롭게 제작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은 합리적인 깃이다. 한편 이 '바라'라는 단어는 사 40-66장에도 약 20번이나 언급되면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다. 즉 (1)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사 42:5;45:7-9) (2)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고(사 43:1, 15) (3)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분이심과(사 65:17) (4) 인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심(사 42:5-9:49:5, 6)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윗의 참회시에도 볼 수 있듯 하나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새 창조의 근원이심(시 51:10; 고후 5:17)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창조하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단어 “bara”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물질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bara”라는 말이 “창조하시니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 그 주체는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하시니라”는 이 단어는 전능자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명백히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 젊음은 모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존귀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기계가 고장 났을 때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가져가면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가면 바로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십시오. 그때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창조’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게 할 뿐 아니라 만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고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역할을 다했다고 떠나는 무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의 눈은 반짝이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
이고, 병이 나면 걱정하고, 학교에 보냅니다. 창조는 세상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관리하시고 통치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걸어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가슴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믿습니다.


 
3) 천지
󰃨 천지 -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 곧 지구를 뜻하나 여기서는 지구를 포함하여 은하계가 자리 잡고 있는 전우주를 가리킨다(2:1).
“천지를” 직역하면 하늘들과 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대기권, 궁창과 그 위의 물, 그리고 천사들이 다니는 맨 위의 하늘 이상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복수로 된 것은 이 사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땅은 직역하면 “그런데 바로 그 땅”이란 뜻입니다. 이는 “지구”를 가리키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주요 관심이 지구로 좁혀졌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이 지구는 인간 삶의 거주지이자 향후 인류 구속사의 무대로서 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하늘”과 “땅”처럼 서로 대조되는 단어가 병기된 것은 이 두 단어가 짝을 이루게 함으로써 그 양극 사이에 포함된 전체를 가리키는 문학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적용> 하나님께 만물의 소유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주 만물과 인생은 하나님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도, 우리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갈등이 있는 이유는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땅이라고, 내 이름으로 땅문서를 섰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죽을 때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땅문서도, 기업도, 반지도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끝날 때 잘 돌려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빌리고 나서 영원히 주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오늘날 우리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145:10).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15:3).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40:26).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우상)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96: 5).
불신자나 무신론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존재의 증명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입의 말씀으로 세계를 존재케 하셨으며 친히 자기를 전지전능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아무도 "창조 행위"를 할 수 없다.
 
욥기 38-4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친히, 창조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무한하신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반박의 여지가 없는 논증임을 장엄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장엄한 묘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지극히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인간의 이성 앞에 제시해 주기도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겸손하게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위엄과 사랑, 능력과 온유함이 모두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나가는 말

수백 권의 서적들이 만물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설명하고자 시도하면서 기원에 관한 주제로 쓰여 왔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시켰습니다. 어떤 물질이 다른 어떤 물질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것은 물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맨 처음에서 히브리어 일곱 단어에 불과한 말씀으로(우리말 성경에서는 네 단어임) 만물의 기원에 관한 그 의문에 영원히 대답해 놓으셨습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 선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주장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론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논쟁의 기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성경은 우리를 설득하거나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류에게 들려오는 큰 우레 소리와 같이 우렁찬 소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창세기 1장 1절 말씀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믿음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진리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계한 모든 일들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는 이 기본적인 증언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건 혹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 보응을 겪게 되건 간에, 그것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엄청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질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자신과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과 커뮤니케이션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혼란스럽거나 염려할 때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 하시며, 당신이 낙담하거나 절망할 때 당신을 인도하시고, 당신이 어리석거나 잘못된 일을 할 때 바로 잡아 주십니다.
 
비극적이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거부하므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사방을 헤매지만,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거부한 채로는 결단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야 말로 일반 세속 세계에 만연한 사상과 얼마나 판이한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현대의 세계를 향해 줄 수 있는 얼마나 놀라운 진술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21세기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제시할 수 있는 명백한 기독교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무의미와 상실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